[미국치과의사] (14) 스토브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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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치과의사] (14) 스토브리그
  • 박진호 원장
  • 승인 2020.02.04 14: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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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치과의사 박진호

내가 살고 있는 필라델피아엔 유명한 Phyllis 야구팀이 있다. 이전에 박찬호 선수도 이 팀에서 훌륭하게 활약한 바가 있어 우리에겐 더 친숙한 팀이다. 2008년 World Series에서 우승도 했지만, 지금은 다시 상위권 진입을 위해 치열한 스토브리그를 보내고 있는 중이다.

대부분 미국 분들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스포츠 팀들이 있고, 평생 그 팀의 열렬한 팬이 된다. 늘 그 팀의 모자와 티셔츠를 입고 다니고 그 팀의 성적과 선수들 이야기 하는 것을 일상으로 삼는 어르신들이 많다. 미국에서 가장 열성적인 응원은 당연히 미식축구지만, 역시나 오래가는 열정은 야구가 제일인 것 같다.

언제나 빨간 Phyllis 모자를 쓰고 오셨던 할아버지 환자 한 분이 있었다. 이름은 Howard K. 그 열렬한 필라 야구팬의 정석처럼 언제나 야구 이야기를 하고 좋아하는 2루수 Chase Utley를 찬양했다. 이 할아버지, 말이 많으시고 대화를 좋아하는 건 좋은데, 문제는 말이 너무 너무 많으신 것이다.

서로 인사를 하고 마취까지 적어도 2분이면 될 일을 10분을 훌쩍 넘기는 경우가 다반사다. 치료를 하는 중에도, 그리고 치료가 끝난 다음에도 이 할아버지의 야구에 대한 수다(?)는 끝날 기미가 없다.

처음엔 이 할아버지가 오시는 날은 나도 Phyllis 게임에 대한 최신 소식을 읽어 놓고, 게임 하이라이트도 열심히 보며 확실한 업데이트를 해 놓았다. 그리고 야구에 대한 수다를 목이 아프도록 같이 즐겼다. 나도 너무 재미있었다. 그러는 동안 이 할아버지의 식구들이 하나 둘씩 우리 오피스(치과)로 오기 시작했는데, 아들 셋, 딸 둘, 그 직계 식구들, 사돈들까지… 정말 굵은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많은 새로운 환자들이 스케줄을 채우기 시작했다.

Howard 할아버지는 말년에 많이 쇠약해지셨는데, 야구에 대한 수다는 여전하셨다. 어느 오후였는데, 엄청 바쁘게 환자 스케줄을 겨우 겨우 소화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Howard 할아버지가 오셔서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야구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난 아주 차갑게 이야기 할 수밖에 없었다.

“Sir, I am running very behind. Can I just focus your dental issue today?”

의도했던 건 아니지만, 너무 바쁘고 경황이 없던 데다 시간에 쫓겨, 나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오고 말았다. 서운해 하시는 그 분의 표정을 곧 바로 읽었지만, 난 그 날 Howard 할아버지의 알맹이 없는 이야기를 받아드릴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치아에 별 이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수간호사가 부축해 나가시며 날 돌아보며 미소를 보내셨는데…

그것이 그분의 마지막이었다. 우리 오피스 방문 후 며칠 뒤 돌아가셨다고 연락이 왔다. 그리고, 간호사가 살짝 귀띔을 해주는데… 몸이 불편했지만 내가 보고 싶어서, 우겨서 겨우겨우 치과에 왔다고 한다.

난 한동안 너무 멍청하게 있다가, 내 방에 숨어 들어가 방문을 잠그고 잠시 울었던 기억이 있다.  늘 잘하다가 한번 그렇게 실수를 했는데, 그것이 바로 마지막이 될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벌써 10여 년 전 이야기다. 아직도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빨간 Phyllis 모자를 쓰고 다닌다. 그 모자를 볼 때마다 Howard 할아버지가 보인다. 싸가지 없이 말을 한 내 모습도 보인다.

우리 치과 비지니스에도 스토브리그가 있으면 좋겠다.

한 시즌을 열심히 죽어라 일을 하고, 다음 시즌을 위해서 충분한 휴식도 하고, 공부도 하고, 조급한 마음도 추스르고,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 박진호 원장은 미국에서 활동하는 치과의사다. 부모님을 따라 19살 때 미국으로 건너가 그 곳에서 대학을 나와 치과의사가 되었고, 현재는 펜실베이니아州 필라델피아 근교에서 치과를 운영하고 있다. E메일은 <smile18960@gmail.co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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