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치과의사] (28) 불법체류자와 Isabe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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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치과의사] (28) 불법체류자와 Isabella
  • 박진호 원장
  • 승인 2021.04.02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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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치과의사 박진호

어제 마지막 환자로 온 사람은 Brian W로 필자랑 오랫동안 환자와 의사로 관계를 맺은 동년배의 남자였다. 한동안 큰 건축회사를 운영하며 친구처럼 지내왔는데, 오랜만에 본 그는 많이 변해있었다. 건강상의 이유로 회사를 그만두고, 그나마 일하던 직장은 이번 코로나 사태로 문을 닫게 되면서 힘든 생활을 보내는 것 같았다. 체중도 몰라보게 줄어 조금 안타까웠다. 그래도 늘 유쾌한 이 친구를 보면 꼭 물어보는 것이 하나 있다.

How’s Isbella doing these days?

10년도 지난 일이다. 어느 날 오피스로 Brian한테 전화가 왔다. 와이프랑 일요일 아침이면 브런치를 먹으러 가는 동네 식당이 있는데, 거기에 서빙 일을 하는 멕시코 소녀가 있다고 했다. 너무 착하고 일도 열심히 하는데 자기가 보기에는 치아에 문제가 많아 보인다는 것이었다.

언어소통에도 문제가 있지만 치통을 달고 사는 것 같다고 했다. 그 당시 Brian도 우리 치과에서 치료를 받는 중이라 그 멕시코 소녀의 치아에 더욱 관심이 간 것 같았다.

큰 비용이 들지 않는다면 자기가 부담할테니 내게 도움을 줄 수 있겠냐는 전화였다. 치과에 자주 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고 식당 주인에게도 허락을 받아야 하는 일이지만 자기가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했다.

흔쾌히 동의를 하고 Isbabella가 왔다.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앳된 멕시코 소녀였다. 첫눈에 봐도 어떤 상황인지 파악이 됐다. 분명 이 소녀는 불법체류자였다. 미국에는 남미에서 건너온 이민자들이 많은데 그중 절반은 불법체류자 신분일 것이다.

미국 내에 허드렛일은 흔히 ‘멕시칸’이라고 부르는 남미사람들이 도맡아서 하고 있다. Isabella처럼 식당일, 잔디 깎는 일 등 흔히 막일 등을 하고 있다. 불법체류 신분이니 당연히 인건비는 너무 저렴하고 일도 성실히 하니, 모두가 동의하듯 미국은 이 남미 출신의 이민자들이 없으면 정말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이를 아는 정부에서도 공공연한 비밀로 하면서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지금은 좀 덜하지만 한때 한인들 가운데에도 신분이 불안한 사람들이 꽤 있었다. 부푼 꿈을 가지고 미국에 입성했지만, 불안한 신분 문제로 인해 고통의 나날을 보낸 분들이 많았다. Korea Town이라고 불리던 한인타운 안에는 합법 신분을 가지지 못하는 분들이 모여 살았고 그런 분들이 주위에 늘 있었다. 때론 숨겨주고 은행 계자를 빌려주고, 사기를 당하고 하는 경우가 일상이었다.

추방당하는 분들도 있었고, 어떻게든 힘들게 이민 절차를 밟아 그야말로 10년, 15년이 걸린 끝에 합법적인 신분을 취득하는 분들도 많았다. 이렇듯 누구든 이민을 오는 분들은 저마다 같은 사연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라떼이야기’로 전락했다.

Isbella를 보니 남의 일 같지 않았다. 내 조카가 될 수도 있는 아이였다. 상황은 그랬고, 입을 벌려 상태를 보니 충격적이었다. 앞의 치아 몇 개만 남겨놓고 음식을 씹을 수 있는 치아들은 모두 망가져 있었다. 상태는 단지 충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부서져 잇몸이 남은 부분들을 다 덮고 있으며 고름이 여기저기 간헐천처럼 퍼져 있었다. 얼마나 아팠을까? 그 많은 시간들을 고통 속에서 보냈을 이 아이를 앞에 두고 보니 내 마음이 무너졌다.

나한테 온 첫날 상한 치아들을 모두 제거해버렸다. 치료 후 바로 다시 식당으로 가야 하는지라 한 방울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봉합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르겠다.

오피스에 비상 시 남겨둔 항생제, 진통제 모두 쥐어주었다. 나머지 앞 치아들은 더 이상 상하지 않기 위해 모두 최고의 재료들을 동원해 Crown으로 씌웠고, 부분 틀니로 씹을 수 있는 기능을 회복시켰다. 먼저 말을 꺼낸 Brian에게는 비용을 지불하도록 했다. 나만 뿌듯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Isabella를 보지 못한 지 한참이 되었다. 들리는 말로는 그 식당을 떠났다고 한다. 어디에 있던 행복하기만 바랄 뿐. 틀니는 계속 조정을 해줘야 하는데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다.

※ 박진호 원장은 미국에서 활동하는 치과의사다. 부모님을 따라 19살 때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대학을 나와 치과의사가 되었고, 현재는 펜실베이니아州 필라델피아 근교에서 치과를 운영하고 있다. E메일은 <smile18960@gmail.co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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