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편지] (39) Healing by Kil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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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편지] (39) Healing by Killing
  • 권호근 교수
  • 승인 2021.12.01 16: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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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호근 선생의 월요편지 39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가 수용되었던 지하 감옥에서 침묵 기도하시는 프란치스코 교황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가 수용되었던 지하 감옥에서 침묵 기도하시는 프란치스코 교황


‘죽임으로서 치유한다’. 앞뒤가 안 맞는 모순적인 말입니다. 이 말은 10년 전 이스라엘 홍해 연안 휴양도시 엘리엇에서 개최된 세계의료윤리학회에서 상영된 다큐멘터리의 영화 제목입니다. 저도 처음에 제목을 보았을 때 무슨 내용인지 짐작이 안 됐습니다. 그러나 ‘아우슈비츠로 가는 철로의 첫 번째 침목은 독일 의사에 의해서 놓여졌다’라는 부제를 보고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20세기 최대의 인류 비극인 아우슈비츠 인종청소의 단초는 히틀러에 의해 기획된 독일 게르만 민족의 종족 우수성 확보를 위한 국가 프로젝트입니다. 우수한 유전자를 확보하고 열등한 유전자를 없애겠다는 미명 하에 유전적 질환을 가진 환자와 어린이들을 격리해 단종 수술을 하고 심한 경우에는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Healing by Killing’의 의미는 유전병 환자를 죽이거나 단종 수술을 함으로써 유전병 발생을 예방해 게르만 민족을 유전적으로 치료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비인도적인 유전자 개조사업을 실질적으로 수행한 사람들은 당시 독일의 유명한 의과대학의 교수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업은 점차 확대되어 소위 사회적 쓰레기라고 낙인찍힌 동성애자, 집시로 확대됐고 급기야는 히틀러의 정치적 야심과 결합, 유대인 인종청소로 확대됐습니다. 히틀러의 인종우월주의가 정치적 야심과 결합해 인류 최대의 비극을 야기한 것입니다. 제가 이 영화를 인상 깊게 본 이유는 ‘과연 내가 당시 독일 의과대학 교수였다면 히틀러 정권이 명령한 비인간적인 사업 수행을 양심의 이름으로 거부할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당시 참여했던 일부 의과대학 교수들은 종전 후에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전범으로 단죄받았습니다.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과는 달리 이스라엘 비밀정보국인 모사드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수송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을 아르헨티나에서 체포, 납치해 이스라엘 법정에 세웁니다. 재판 당시 자신은 우연히 유태인을 이송하는 위치에 있어서 상부의 명령대로 따른 것이라고 무죄항변을 합니다. 이 재판을 참관한 여류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악의 평범성’이란 주장을 해 나치를 옹호한다는 비난을 받습니다. 전범 재판장에 선 전범들은 특별하게 품성이 악하거나 이상한 사람들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란 점에서 한나 아렌트는 충격을 받습니다. 그들은 평범한 가장이자 직장에서는 열심히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한 보통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한나 아렌트는 모든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고 평범하게 행하는 일도 악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을 합니다. 한나 아렌트는 이들이 악한 행위를 저지른 것은 평소 스스로 사유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평소 스스로 사유하지 않고 시류에 편승하여 산 것이 바로 이들의 죄라고 주장합니다.

예일 대학의 심리학 교수 스탠리 밀 그램이 행한 실험은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권위에 복종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권위주의적인 조직이나 사회는 구성원들을 쉽게 범죄로 내몰 수 있습니다. 일제에 의해서 잔인한 침략전쟁이 발생한 것도 침략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일본 천황체제 때문이지만 그런 침략전쟁에 반대하지 않은 일본 국민들도 책임이 있습니다.

인류에게 절망을 안겨준 110만 명이 학살된 비극의 현장에도 인류에게 희망을 주는 일이 있었습니다. 탈옥하다 잡힌 가족이 있는 가장을 대신해 스스로 처형당하기를 자처한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의 이야기입니다. 이런 분들이 있기에 인류는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아우슈비츠를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콜베 신부가 수감됐던 지하 감방을 방문해 15분간 침묵의 기도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교황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방문 기사를 읽으면서 10년 전에 본 Healing by Killing이란 다큐멘터리 영화가 새삼 다시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나 자신에게 반문해 봅니다. 과연 나는 콜베 신부같이 남을 위해서 대신 죽지는 못하더라도 악의 평범성을 거부하고 스스로 양심적 판단에 의해 행동할 수 있는가?

악의 평범성을 거부하고 부당한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힘은 스스로 사유하는 데서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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