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편지] (48) 견월망지(見月忘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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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편지] (48) 견월망지(見月忘指)
  • 권호근 교수
  • 승인 2022.09.07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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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을 보지 말고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보라는 의미의 ‘견월망지’는 형식에 집착하지 말고 본질을 보라는 의미로 佛家에서 자주 언급되는 말입니다. 
강을 건너기 위하여 뗏목을 만들었다면 강을 건넌 후에는 뗏목을 버려야 한다는 금강경의 뗏목비유나 장자 「외물편」 에 나오는 고기를 잡았으면 통발을 버리라는 ‘득어망전(得魚忘筌)’도 비슷한 의미입니다. 모든 종교에는 종교의 내용을 담는 형식과 제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형식과 제의에 집착하다보면 종교가 추구하는 본질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치의예과 기독교 개론 강의를 하셨던 이대 교목이신 김흥호 교수님은 기독교보다는 동양 철학, 특히 불교에 대해 강의를 많이 하셨습니다. 그중에서도 우리나라 불교 선승에 대한 일화를 자주 말씀하셨는데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원효대사에 관한 일화입니다.
원효대사께서 탁발을 하면서 전국을 주유할 때 추운 겨울날 저녁 잘 곳이 없어서 절에 가서 하루 밤 묵을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지는 원효대사를 몰라보고 추운 법당에서 자라고 하였습니다. 밤에 추위를 못 참은 원효대사는 법당 안에 있는 나무불상을 쪼개서 불을 피워서 추위를 피했습니다. 아침 예불을 드리려고 법당에 온 주지가 불상은 보이지 않고 마당에 보니 불상이 불타 버린 흔적이 있었습니다. 노발대발한 주지가 원효대사에게 왜 불상을 불쏘시개로 사용했냐고 묻자 원효가 태연하게 어젯밤에 내가 너무 추워하니까 불상이 추우면 나를 쪼개서 불을 피우라고 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주지가 어떻게 나무토막이 이야기를 하냐고 화를 내자 원효 왈 당신 말대로 추워서 나무토막을 장작으로 사용한 것이 무엇이 문제냐고 답변하였다고 합니다.
주지는 아침마다 예불을 드렸지만 부처님이 아니라 나무토막에다 대고 예불을 드린 것이고 원효는 불상을 장작으로 사용하였지만 불상에서 부처님을 본 것입니다. 불상은 손가락이고 자비는 달입니다. 형식에 치우치면 교리인 손가락이 본질인 달을 아예 가려버립니다.
유홍준 교수가 저술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유홍준 교수가 절 답사를 위해 아침에 집을 나오려는데 부인이 절에 가면 절집만 보지 말고 법당에 가서 절도 좀 하고 오라고 당부하자 유홍준 교수가 내가 왜 나무토막이나 돌덩어리에 절을 하냐고 말합니다. 그러자 부인이 나무토막이나 돌에도 고개를 숙일 수 있는 겸손을 배우고 오라는 의미라고 일갈하였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남편보다 부인이 한수 위라는 생각이 듭니다. 불교신자들이 불상 앞에서 절하는 이유는 대부분 부처님의 가호를 빌고 복을 달라는 의미로 절을 합니다. 이러한 구복신앙이 바로 종교에서 금하는 우상 숭배입니다. 불교 수행에서 절을 하는 의미는 ‘下心’ 즉 자아를 내려놓고 마음을 비우라는 의미가 더 큽니다. 저도 한때 연구실 문 앞에 下心이라고 붓글씨로 써서 붙여 놓았던 적이 있지만 下心이라고 써서 붙여놓는다고 쉽게 下心이 되지는 않습니다.
영화 <침묵>에서 로드리게 신부가 성화밟기를 주저하자 성화 속 예수께서 “나는 밟히려고 이 땅에 왔다. 주저 말고 밟아라”는 장면을 보면서 김흥호 교수님에게 들었던 원효대사의 일화가 생각났습니다. 종교가 형식에 치중하다 보면 달을 보기보다는 손가락을 보는 일에 치중합니다. 불교에는 殺佛殺祖 부처가 나타나면 부처를 쳐 죽이고 조사가 나타나면 조사를 쳐 죽이고 오직 불법 만에 의지하여 무소처럼 뚜벅뚜벅 걸어가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모든 형식과 우상을 쳐부수라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원효 같은 분은 손가락이 없어도 달을 볼 수 있지만 凡人들은 손가락 없이 달을 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올바른 종교생활을 위해서는 종교적 율법과 계율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見月忘指 하는지는 항상 되새겨 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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