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편지] (49) 길 없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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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편지] (49) 길 없는 길
  • 권호근 교수
  • 승인 2022.09.30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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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 대웅전
수덕사 대웅전

기독교 개론 종강 후 배움을 더 청하기 위하여 이화여대 김흥호 교수님의 연구실로 찾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교수님께서 방학 중 이대에서 하는 한문강독 청강을 허락한 덕분에 백 명 되는 이대생 사이에 앉아서 한문강독을 듣는 호사(?)를 누렸습니다. 교수님은 신학을 전공하신 목사지만 동서양 철학과 불교 경전도 통달하신 분입니다. 당시 일일일식하면서 묵상기도를 많이 하셔서 교수보다는 도인의 풍모가 배어 나오는 분입니다.

당시 시중에는 김흥호 교수님이 득도하였다는 소문이 났습니다. 그러자 한 스님이 찾아와서 “당신이 득도하였다고 하는데 어느 스님이 인가해주었는가?”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교수님은 “석가모니는 보리수 밑에서 득도를 하고 누구한테서 인가를 받았는가?”라고 되묻자 그 스님은 아무소리도 못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촌철살인과 같은 답변입니다. 득도는 불법을 등불삼아 무소처럼 길 없는 길을 혼자 걸어가는 과정입니다.

『길 없는 길』은 근대한국 선불교를 중흥시킨 경허선사(鏡虛禪師)(1849-1912)의 일대기를 그린 최인호 작가의 소설로 당시 백만 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입니다. 경허(鏡虛), 만공(滿空), 효봉(曉峰)은 근대 한국 선불교의 근간과 전통을 세운 분들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김흥호 교수님은 강의 시간에 이 분들에 대한 일화를 자주 언급하셨습니다.

경허와 만공선사가 탁발하면서 전국을 주유할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은 시주를 많이 받아 등에 멘 바랑이 무거웠는지 만공선사가 걸으면서 헉헉대었습니다. 그러자 경허선사는 물동이를 인 처녀가 앞에 오자 귀를 잡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놀란 처녀는 물동이를 떨어뜨렸고 이를 본 마을 사람들이 몽둥이를 들고 쫓아와서 두 선사는 죽을힘을 다해서 간신히 도망을 쳤습니다. 간신히 도망친 후 만공스님이 스승인 경허선사의 행동에 대해서 불만을 표시하자 “덕분에 빨리 오지 않았느냐.” 그러면서 “바랑이 아직도 무겁더냐? 무거운 것도 다 마음 장난이다. 근데 입은 내가 맞추었는데 왜 자네가 그것을 마음에 담고 있는가.”하는 질책을 듣고 만공선사가 크게 깨달았다고 합니다. 경허선사의 제자인 만공, 수월, 혜월 스님들은 한국 불교계의 중추적인 선승으로 활약하게 됩니다.

경허선사의 수제자인 만공선사는 일본 총독 미나미 지로가 전국 주요 31개의 사찰 원로 스님들을 모아 놓고 한국 불교를 대처승 위주의 일본 불교화할 것을 주문하자 총독 면전에서 한국 불교에 간섭하지 말라고 책상을 치면서 일갈하고 회의장을 박차고 나온 기개가 대단한 분입니다.

만공선사는 승려 이전에 독립지사입니다. 덕분에 한국불교가 왜색불교화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만공선사는 예산 덕숭산 수덕사를 중창하고 비구니 수행기관인 견성암을 창건하였습니다. 그 후 수덕사 덕승총림(승려 양성기관인 강원이 있는 큰 사찰)의 큰 스님인 방장으로 계셨습니다. 지금도 덕승총림은 근대 한국 선불교의 기틀을 마련한 경허, 만공선사가 주석하셨던 사찰로 한국 불교의 뿌리라고 하여 스님들의 자부심이 매우 높습니다.

아프리카에는 독특한 원숭이 사냥법이 있습니다. 표주박에 미끼를 넣고 표주박을 나무에 묶어놓으면 원숭이들은 표주박 안의 미끼를 움켜잡고 사냥꾼이 와도 움켜쥔 손은 놓지 못하고 결국 잡힌다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탐욕, 어리석음, 분노를 탐(貪), 진(瞋), 치(恥)의 삼독(三毒)이라고 하여 죄악으로 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죄악은 탐욕입니다. 득도는 세속적인 모든 탐욕과 득도하겠다는 생각 자체도 내려놓은 무념무아(無念無我) 상태를 말합니다. 경허선사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말년에 함경도 오지 삼수갑산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훈장을 하면서 일체 흔적을 남기지 않고 혼자서 생을 마치셨습니다. 파계의 경계를 넘나드는 많은 일화와 기행을 남기고 말년에는 불교라는 종교도 초월한 비승비속(非僧非俗) 상태로 한 세상 훨훨 살다가 간 분이 경허선사입니다. 어쩌면 21세기를 사는 우리 모두는 길 없는 길을 가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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